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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정칼럼

 
작성일 : 19-07-01 10:08
기후 침묵, "멸종을 앞당기는 사악한 침묵" / 한재각 소장
 글쓴이 : 에정센…
조회 : 7,570  
현대 한국 사회를 주조한 ‘개발주의’는 정치적 좌우 혹은 진보/보수를 떠나서, 엘리트들의 내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그들은 기후변화 문제가 경제성장를 방해할 것이라는 본능적 공포감에 휩싸여 외면하고 침묵하는 것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엘리트들의 이런 심리적 풍경 속에서, 5년 임기의 대통령과 청와대이 기후위기를 핵심 의제로 다룰 의향과 용기가 있을 것이라 기대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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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침묵, "멸종을 앞당기는 사악한 침묵"
[에정칼럼] 무지, 심리적 거부, 그리고 의식적 축소

지난 5월 말에 때 이른 폭염이 찾아왔다. “기후변화 때문이야…” 다들 한마디씩 했다. 그 날 Jtbc는 보통의 일기 예보가 아니라, 별도의 꼭지로 때 이른 폭염을 자세히 보도했다. 얼마나 더운지,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어 하는지, 어떻게 피해야 할지… 그러나 “한 걸음 더 들어간다”는 그 채널은 거기에서 멈추고,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다. 왜 때 이른 폭염이 왔는지 짚고, 세상 사람들 다 아는 ‘기후변화’를 환기시켜 주지도 않았다. 그들에게 한 걸음 더 들어가야 할 관심사에 기후변화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 채널의 기자와 기후변화에 관한 토론회에 함께 참여하게 되었다. 그는 한국 언론이 얼마나 기후변화에 무관심한지 지적하면서, 영국 소식을 전했다. 최근 ‘기후위기’를 경고하는 ‘멸종저항’자들이 점심 시간에 BBC 건물의 모든 문을 봉쇄하고 누구도 빠져 나올 수 없게 만들었단다. BBC 기자 등 직원들에게 “점심 먹을 자격이 있을 만큼”, 기후변화를 얼마나 열심히 보도했는지 따졌단다. 그들이 한국에 온다면 우리 언론 종사자들은 한 달 내내 굶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혼자 피식 웃었지만, 씁쓸한 상상이다.

한국 기자들 중에 기후변화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고 자기반성하는 이들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토론회의 그처럼 말이다. 또한 여러 전문가, 학자, 활동가들도 기후변화에 대해서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솔직히 이들의 노력만으로 변화될 일인지 회의적이다. 내가 보기에는, 언론 기자를 포함한 한국 사회의 엘리트들이 가지고 있는 기후변화에 관한 인식과 판단에 어떤 구조적인 장벽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 장벽을 부수지 않으면 안 된다.

지난 3월에 기후변화에 관한 인식을 조사한 한국리서치의 보고서에 의하면, 한국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의제가 무엇인지에 묻는 질문에 기후변화를 3위로 꼽았다. 1위 경제/일자리 문제, 2위 고령화/저출산 문제 다음이었다. 언제나 한국 사회에서 중요한 의제로 꼽히는 남북관계가 4위였다. 한 사회학자는 이 결과를 두고 보수층들이 전략적으로 남북관계에 대해서 저평가해서 순위가 낮아졌을 수도 있다는 해석하기도 했다. 그것을 감안해서 볼 때도 기후변화가 대중들에게 심각한 의제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여러 강의를 다니면서 접하는 시민 반응과도 일치한다.

이에 비해 한국의 언론 기자, 정치인, 정부관료, 지식인 등 한국 사회의 엘리트들이 기후변화 문제에 합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나. 부정적이다.

작년 말, 정부의 고위 정책책임자들과 에너지전환에 관해서 의견을 나누는 자리가 있었다. 개별 사업과 예산이 아니라, 정책 방향과 담론을 이야기하는 자리였다. 정부의 에너지전환이 현재의 어떤 문제에 대한 대응일 텐데, 그 문제를 무엇으로 삼아야 하는지 토론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들은 한사코 기후변화 대응을 에너지전환이 다루려는 핵심 의제로 삼을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대신 눈에 보이는 미세먼지는 괜찮을 것 같다고 했다. 그 자리에 이런 생각에 동의하는 환경 전문가들도 몇몇 있어서, 솔직히 놀랐었다.

그런데 정부 고위 정책책임자들은 왜 기후변화만큼은 정권의 핵심 의제로 삼는 것을 한사코 거부하고, 일부 환경 전문가들까지도 동의한 것일까. 일단 기후변화의 대체물로서 미세먼지가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미세먼지와 기후변화 의제가 대립하는 것도 아니며 ‘동전의 양면’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때문에 당장의 에너지전환 정책담론의 핵심적 요소로 활용할 수 있다. 미세먼지 문제의 가시성으로 인해서 에너지전환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과 지지를 끌어들이기 쉽고, 또한 그 사회적 압력이 구체적이기도 하다. 그래서 반기문 씨를 불러 들여 미세먼지 범국가대책기구를 설치하고 위원장 자리에 앉힌 것이다.

그러나 미세먼지는 의제 방향 설정과 해결책의 모색을 교란하는 요소들도 많다. 미세먼지 문제는 가시성 때문에 중요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취약하다. 주로 봄철에 집중된 미세먼지 고농도 시기를 지나면 대중의 관심은 크게 떨어진다. 또한 미세먼지의 국지성으로 인해 에너지전환이라는 보편적 해결책을 추구하기보다는 중국에 대한 정치적 반감이 뒤섞인 현행유지 심리에 발목을 잡히기 쉽다. 무엇보다도 미세먼지는 기술적으로 조정될 여지가 많아서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사회적 변화를 외면할 기회도 많다. 굴뚝에 집진기를 더 달아서 노후 석탄발전소는 계속 돌리자는 발상이 자연스럽게 수용될 수 있다. 미세먼지 담론만으로는 부족하다.


과학자들은 이대로라면 파리협약의 2도씨 목표를 위한 허용배출량 한계를 넘어서는 데 채 20년이 안 걸릴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영국의 ‘가디언’지는 ‘기후변화’가 아니라 ‘기후위기’라는 용어를 사용하겠다고 선언했다(지금 유럽이 겪고 있는 폭염을 보라). 영국 의회가 ‘멸종저항’자들의 지속적인 시위와 점거의 압력에 ‘국가비상상태’를 선포했다. 비슷하게 여러 국가들이 탈석탄발전과 배출제로를 속속 선언하면서 이 위기에 대응하려고 노력 중이다.

전 세계 국가들이 미세먼지가 아니라 기후위기 담론을 동력삼아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에너지전환을 추진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도 취임 이후 유엔 총회, G20 정상회의 등에 참석할 때마다 기후위기를 경고하고 행동을 촉구하는 연설의 배경이다. 국내용은 빈약한, 수출용 라면과 같은 연설이지만.

한국 사회의 엘리트들이 기후변화 의제를 집요하게 후순위로 돌리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기후변화에 대한 심리학 연구자들이 이야기하는 것들을 생각해볼 수 있다. 기후변화 문제가 너무나 거대해서 몇 가지 정책조정으로 다룰 수 없으며, 그 해결책은 지금까지 쌓아 올렸던 거의 모든 것을 바꿔야 할 일이다. 그런 변화는 너무 막막하고 또한 두려워서 가능한 회피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쌓아 올린 것이 많아 잃을 것도 많은 엘리트들은 더욱 그럴 것이다.

한국 엘리트들의 심리적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 더해서 현대 한국 사회를 주조한 ‘개발주의’는 정치적 좌우 혹은 진보/보수를 떠나서, 엘리트들의 내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그들은 기후변화 문제가 경제성장를 방해할 것이라는 본능적 공포감에 휩싸여 외면하고 침묵하는 것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엘리트들의 이런 심리적 풍경 속에서, 5년 임기의 대통령과 청와대이 기후위기를 핵심 의제로 다룰 의향과 용기가 있을 것이라 기대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일 수 있다. 한걸음 더 들어간다는 Jtbc가 종종 멈춰 서는 것도 이해된다. 일부 환경전문가들이 기후변화는 국민적 관심사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전략적 판단’을 하는 강변하는 이유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심리학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명박 정권 때 ‘탄소시장’이라는 또 하나의 새로운 시장을 만들었다는 사실에는 열광하였던 이들이, 그것이 기존의 기업 활동을 위축시키고 자본의 이윤 추구를 방해한다는 우려 때문에 무력화되고 있다는 비판을 무시하는 것은 정치학의 문제다. 공적 담론장에서 그리고 정부의 핵심 의제에서 기후변화 담론을 주변부로 밀어내는 의식적이고 적극적인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2050 장기 저탄소발전 전략을 수립하는 환경부 포럼에서 한국에서 가장 많은 온실가슬 배출하는(한국 전체 배출량의 10% 이상) 포스코 상무가 산업분과장의 자리를 차지하고, 기회가 되면 “너무 명분론만 강조해서는 안된다”는 발언을 일삼는 상황이 이를 잘 보여준다.

기후 침묵은 무지, 심리적 거부, 그리고 의식적 축소 사이에서 싹트고 튼튼하게 자리잡고 있다. 한국 사회는 기후침묵 사회다. 영국 BBC 건물을 봉쇄했던 시위자들, 땅이 가라앉고 있는 방글라데시의 농민들, 그리고 기후 학교파업을 하고 거리에 나온 청(소)년들은 아마도 “멸종을 앞당기는 사악한 침묵”이라고 비판할 것이다. 이제 한국 사회 엘리트들의 기후침묵을 깨자.

/ 한재각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장)


* 에정칼럼은 레디앙에 동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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