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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정칼럼

 
작성일 : 19-12-03 13:41
'인류 자살의 시대', 우리 자신의 멸종 가능성에 대한 외면 / 하바라 연구원
 글쓴이 : 에정센…
조회 : 7,393  
기온 상승은 공격성과 분노를 조장하고 자연재해는 우울감과 좌절감, 외상후스트레스를 야기하고, 그 밖에 가뭄과 해수면 상승은 경제적 손실과 생활터전을 잃어버리게 한다. 이렇게 직접적인 원인을 제외하고서라도 기후변화라는 전 지구적 변화는 인류 생존의 불확실성과 그 불확실성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사회의 대응은 매일같이 좌절감을 안겨준다. 사회 전반에 깔린 우울감과 혐오는 인류가 세상과의 공감대를 갖지 못한 채 개인으로 고립되고, 함께 미래를 찾아나가야 하는 원동력을 빼앗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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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자살의 시대', 우리 자신의 멸종 가능성에 대한 외면
[에정칼럼] "사회와 함께 죽음으로 달려가지 말자"

인류는 왜 생명체의 특성인 생존본능을 잃어버렸나?
100세 시대라는 2019년. 인간의 기대수명은 지금도 계속 연장되고 있다. 이는 틀림없는 과학의 산물이자 선물이지만, 지금 시대에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더 오랜 시간 살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살 수 있을까?
사회적으로 우울감이 넘쳐나는 시대이다. 우울증 환자의 숫자와 자살률은 계속해서 늘어가고 있어 신체의 기대수명은 늘어가지만, 정신의 기대수명은 줄어드는 듯하다. 장수한다는 소식에 건강을 걱정하고, 그에 앞서 노후를 위한 경제력을 걱정하고, 건강한 신체와 충분한 경제력이 있어도 이유를 명확히 할 수 없는 우울감에 허덕인다. 이제야 우울증과 자살이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 문제로 인식되기 시작했지만, 아직까지 그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는 없는 것 같다.
얼마 전 고 설리와 고 구하라의 죽음은 더 이상 우울증과 자살이 개인의 극단적인 선택이 아니라 사회가 고의적으로 개인을 살해하기 시작했다는 경종으로 보인다. 지금의 사회는 개인을 정당한 이유 없이 가해하고 그 피해는 돌고 돌아 다시 사회로 돌아온다. 결과적으로 사회적 자살을 하는 셈이다. 사회적 우울증의 원인은 비교적 쉽게 규명되고 있다. 20대의 취업난, 경제적 불확실성과 불평등, 과도한 경쟁, 지나친 노동시간 등으로 인간성을 상실하게 한다. 이성적이지 못한 자기중심적 사회는 집단으로 타인을 가해하고 무관심과 책임전가로 문제에 대한 진상 규명조차 거부하고 있다.
기후위기에 대한 인류의 대응도 비슷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기후변화로 인한 인류 멸종 가능성이 계속해서 제기되고 점점 더 가시화되고 있지만, 기후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사회의 대응은 아직 한참 미흡하다. 얼마 전 발표된 IEA의 ‘세계 에너지 전망 2019’ 보고서에서는 탄소배출량 감축 목표와 정책 간의 괴리 때문에 2040년까지 에너지 수요량과 탄소배출량이 계속 증가하여 과연 지구온난화 가속을 억제할 수 없을 것이라는 예측을 내놨다.
또 세계기상기구(WMO)는 2018년 전 지구 이산화탄소 연평균 농도가 407.8ppm으로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했고, 26일 UNEP이 공개한 ‘온실가스 격차 보고서’에 의하면 2018년 온실가스 배출량은 553억 톤으로 사상최고치를 기록하여, 이대로라면 지구의 온도가 기존에 목표했던 1.5도와 2.0도씨를 훨씬 웃도는 3.2도씨 가량 치솟을 수 있다 경고했다.
이런 절망적인 예측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인류는 ‘언제나 그렇듯이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인가. 아니면 언제나 그렇듯 답을 찾을 것이라는 변명 속에 인류는 자살을 시도하고 있는 것일까. 지구가 기후변화 인해 인류가 살 수 없는 환경으로 변해버리기 전에 화석연료 사용을 금지하고, 사회전반적인 탄소 집약적 경제 구조에서 벗어나야 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탄소배출의 주요 책임자들과 이해관계자들은 기후위기의 영향을 가장 적게 받고 있고, 눈앞의 이익을 위해 기후위기를 위한 행동을 최대한 미루는데 온 힘을 다하고 있다.
이렇게 사회가 만들어낸 기후변화는 돌고 돌아 다시 개인에게 우울감을 선물한다. 영국의 Wooster University 심리학 교수인 Susan Clayton은 기후변화가 인간의 신체적 정신적 건강에 영향을 끼친다고 주장한다. 기온 상승은 공격성과 분노를 조장하고 자연재해는 우울감과 좌절감, 외상후스트레스를 야기하고, 그 밖에 가뭄과 해수면 상승은 경제적 손실과 생활터전을 잃어버리게 한다는 연구결과를 제시했다.
이렇게 직접적인 원인을 제외하고서라도 기후변화라는 전 지구적 변화는 인류 생존의 불확실성과 그 불확실성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사회의 대응은 매일같이 좌절감을 안겨준다. 지금의 사회가 포기해버리는 2040년에 내가 살아갈 삶의 터전이 남아있기나 할까?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주는 우울감과 그 우울감이 주는 체념, 그 악순환의 고리는 어떻게 끊어야 하는가. 사회 전반에 깔린 우울감과 혐오는 인류가 세상과의 공감대를 갖지 못한 채 개인으로 고립되고, 함께 미래를 찾아나가야 하는 원동력을 빼앗고 있다. 압도적인 기후위기로 인한 인간 혐오는 생명체로써의 인간의 생존본능을 왜곡시킨다.
기후위기는 인간에 의해 도래했고 인간은 인류멸종을 막기 위해 기후위기를 반드시 극복해야만 한다. 하지만 결국 기후위기의 원인은 인간이라는 사실에, 인간 자체의 존재를 혐오하기도 하고, 더 나아가 인간의 개체수를 조절하는 것만이 가장 효율적이고 필수적인 방법이라는 의견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반대로 이렇듯 생명체로서 기본적인 생존본능을 잃어버린 인간에게 기후위기가 무슨 대수일까. 인류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전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어차피 몇십년 후에 인류는 돌이킬 수 없이 멸종의 길을 걷게 될 것이고, 사람들은 자기 앞가림에 챙기기에 바쁘니, 나도 당장에 이 사회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 아등바등 할 수밖에 없는 걸까. 기후위기의 시대에 한국 사회는 젊은 세대에게 잔인하다. 말뿐인 것 같은 2020년 신기후체제를 앞에 두고 2019년을 살아가는 20대의 한 개인으로서 사회가 주는 우울감과 기후변화가 주는 좌절감은 미래에 대한 최소한의 기대나 희망도 빼앗아버리는 것 같다.
우리는 100세까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의·식·주를 갖추기 위해 끊임없는 경쟁과 노동을 해야 하고, 커져가는 사회의 불평등과 불확실성에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듯한 좌절을 겪는다. 거기에 기후위기라는 압도적인 전 지구적 재앙은 이런 모든 문제에 대한 충돌 회피, 무기력은 체념을 위한 좋은 이유가 되기도 한다. 인류가 멸종할지도 모른다는 말도 안 되게 거대한 사실과, 당장 먹고 살 걱정이 태산이어서 남의 문제 같은 기후변화는 뒤로 미루게 된다는 변명의 간극은 무엇일까. 어느 것이든 한 개인이 해결하기에는 너무도 큰 문제이기에 사람들은 의식적, 무의적으로 문제의 원인 규명을 막고 해법 찾기나 심리적 회복을 막고 있다.
지금까지 유지되어 왔던 사회 시스템은 사회 경제적으로도 우리의 미래를 보장해주지 못하고, 기후위기는 지금까지의 삶의 형태를 유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쉽게 생각하자.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 세상을 흔들고 세상을 바꿔야한다. 우리에게 안정적인 삶과 행복을 빼앗는 사회 시스템을 거부하고 인류가 살아남을 수 없다고 얘기하는 어른들의 말을 무시하자. 우리에게는 아직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고, 살아갈 의지가 있고, 함께 헤쳐 나갈 동료들이 있다. 밑도 끝도 없는 우울한 늪에 빠져 사회와 함께 죽음으로 달려가지 말자. 지금부터 우리가 만들어 나가는 것이 진짜 현실이다.

/ 하바라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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