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로운 전환을 위한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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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정칼럼

 
작성일 : 21-03-11 10:37
정의로운 전환을 위한 차별금지법 / 하바라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연구원
 글쓴이 : 에정센…
조회 : 181  

우리는 살고 싶다. 살아남고 싶다.
인간사회가 초래한 기후위기로부터, 인간사회가 만드는 불평등으로부터.

하루가 멀다 하고 세계의 저명한 기관들은 기후위기의 긴박함과 기후위기로 인해 초래될 불평등에 대해 앞다투어 경고성 보고서를 발표하고 있다. 자본의 축적을 위해 끊임없이 약자와 소수자들을 착취하는 식민주의적 자본주의 시스템은 무분별한 개발로 기후변화를 초래했다. 그 기후변화는 다시 생태적, 환경적, 경제적, 사회적 위기를 만들어내고, 적응과 대응 과정에서 사회의 가장 취약한 곳부터 짓밟을 것이다.

전세계를 강타하는 코로나19도 기후변화로 인한 생태다양성과 환경 파괴의 결과이며, 코로나 시국에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그렇다. 생태를 보살피지 않는 자본주의는 규모의 경제를 좇으며, 다수의 약자와 소수자들은 착취당한다. 생태 파괴로 인한 피해는 다시 경제적으로 취약한 곳에서 증폭되며, 그 악순환은 시스템이 바뀌지 않는 이상 계속된다. 그래서 기후위기를 막기 위해서 지금의 지속불가능한 시스템을 전환해야 하며, 식민주의와 자본주의를 끝내야만 한다.

정의로운 전환은 기후위기로부터 벗어나 지속가능한 사회로의 전환을 위해 필수적인 원칙이다.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는 창립선언문에서 ‘정의로운 전환’이란 지속가능한 사회로의 전환 과정에서 이에 따른 피해와 비용이 사회적 약자에게 일방적으로 전가되어서는 안 되며 정의로운 방식으로 배분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국제사회에서도 2010년부터 유엔 기후변화협약에서 정의로운 전환을 공식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했다. 기후변화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저탄소 사회를 구축하기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며, 지속가능한 생산·소비·삶의 양식에 기반하는 정의로운 전환을 보장해야 한다고 했다. 또, 국제노동기구(ILO)가 2015년에 발표한 「모든 사람을 위한, 환경적으로 지속가능한 경제와 사회를 향한 정의로운 전환 지침」의 13조의 ‘환경적으로 지속가능한 경제 및 사회로 전환하기 위한 7대 이행 원칙’을 제시했다.

국제사회에서의 정의로운 전환 논의는 인권과 노동권에 기반하고 있으며, 최근 국내에서도 작년부터 기후위기 대응과 정의로운 전환 논의가 활발해졌다. 그린뉴딜뿐만 아니라 기초자치단체들의 기후위기 비상선언이 이어졌고, 이소영 의원 등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탈탄소사회 이행 기본법안을 발의했다. 거기에 더 나아가 시민사회에서 기후위기 비상행동은 국회에 ‘기후정의 기본법’ 제정을 요구했다. 대부분의 탄소중립이행법안에는 “기후위기의 원인이 되고 있는 경제성장 중심주의와 불평등 체제에 대한 충분한 문제의식과 극복 방안이 담겨 있지 못하다”면서 기후정의 실현이 시급함을 강조했다. 이것이 정의로운 전환의 원칙이 모든 기후위기 대응에 앞서 가장 먼저 고려돼야만 하는 이유이다.

그런데, 정의란 무엇인가? 이것은 모대학 교수의 철학적인 질문보다 원초적인 질문에 가깝다.

지난 3월 6일 저녁, 가족과 함께 YTN 티비를 보고 있는데 무지개 깃발 위에 ‘우리는 함께 살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휘날렸다. 성소수자에 관련한 간단한 성교육과 성소수자 인터뷰 등을 담고 있는 짤막한 프로그램이었고, ‘우리는 이미 함께 살고 있다’며 마무리됐다. 낯설고 어색했고, 긴장됐다. 그럼에도 반가웠다. 그러다 이 반가움 뒤에는 수많은 비극이 있다는 것에 침통해졌다.

성소수자 활동가들이 별이 됐다. 성소수자 인권의 최전선에서 목소리를 내던 활동가들이었다. 나는 마음속으로만, 개인적으로만 소극적인 응원을 해왔다. 하지만 그들이 지자, 그동안 애써 모른 척하고 무시하던 분노가 일었다. 2007년에 최초로 차별금지법안이 발의되고 수차례 폐기되면서, 한국 사회는 국민에게 혐오를 팔았다. 혐오를 팔아 차별을 정당화했다. 성소수자라는 공동의 적을 만들었고, 마음껏 혐오하고 배척할 수 있는 대상을 만들었다. 코로나 시국에도 그 사회적 혐오는 계속됐다. 정부와 언론이 나서서 확진자들의 성정체성(감염경로 확인과 깊은 관련이 없는)을 강조했고 언급했다. 빨갱이 대신 에이즈를 외칠 수준이다.

OECD의 ‘한눈에 보는 사회 2019(Society at a Glance 2019)’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성소수자 포용지수는 2.8점으로 OECD 국가 평균인 5.1점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 또, 지난 2019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인권실태를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과반인 54%가 ‘인권 침해가 심각하다’라고 답했다. 흥미로운 점은 인권실태조사 설문결과에서 성소수자에 인권의 중요도와 차별 심각성은 낮은 반면, 성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거리감과 불편함은 최상위였다는 점이다. 성소수자는 그야말로 한국에서 보이지 않았으면 하는 존재,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존재, 성소수자의 인권은 크게 고려할 필요조차 없는 존재였다. 그 반증으로, 가장 큰 ‘논란’이 되고 있는 차별금지법이 국회에서 제대로 된 ‘논의’조차 진행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성소수자들은 어떻게 이렇게 쉽게 배척되고 숨겨졌을까? 원리는 간단하다. 교과과정에서부터 성소수자들의 존재를 지우고, 사회적 거리감을 키우고, 사실이 아닌 거짓으로 혐오를 키웠다. 비성소수자들은 성소수자들의 혐오를 통해 우월감을 갖고, 차별에 대한 제제가 없으니 혐오할 수 있는 권리는 쉽게 샀다. 그렇게 형성된 이익 집단은 표 혹은 자본이 되었고, 공공의 적을 둔 집단은 견고해졌다.

가장 정의 및 인권과 관계가 깊은 듯 보이는 ‘차별금지법’, 이름만 봐서는 당연한 것을 위한 당연한 법인 것 같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논의조차 암묵적으로 금지된 ‘터부’법이다. 2007년 17대 국회에서 처음 발의되고 20대 국회를 제외하고 새로 출범하는 국회마다 계속 발의되고 있으나, 앞서 말한 이익집단의 강력한 반대로 번번이 폐기되거나 철회됐다. 별 내용 없다. 그냥 당연하게 모두가 모두의 권리를 침해받지 않도록 차별하지 말아라-하는 내용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차별할 권리를 박탈당할 수 없다(?)며 논의다운 논의를 거부하고 있는 상황이다.

해당 이익집단의 입장을 대변하듯, 다수의 서울시장 후보들이 ‘차별반대에 반대할 권리’를 내세우며 선거운동을 하고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지난해 6월 국가인권위원회 조사에 의하면 응답자의 88.5%, 즉 국민 대다수가 차별금지법 제정이 필요하다고 공감하고 있다. 결국, 실체도 불명확한 반대로 21대 국회에서 장혜원 의원이 발의한 차별금지법안도 현재 제대로된 논의도 거치지 못한 채 상임위원회인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이쯤 되니 표면적으로는 교회 등 보수단체의 반대로 성소수자 문제 때문에 법안이 묶여있는데, 오히려 그 외의 보이지 않는 기득권층이 성소수자 문제 덕분에 효율적으로 법안을 붙잡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차별금지법이 생기면 차별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그 차별을 방지하기 위해 (누군가가) 기존에 누리던 것들을 포기해야 하며, 정의 실현을 위해 전보다 훨씬 돈을 많이 써야 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것이 정의로운 전환의 핵심이자, 차별금지법 제정 반대의 핵심(일수 있)이다. 일각에서는 논의가 많은 성소수자 조항을 빼고 차별금지법을 제정하자는 의견도 있다. 차별금지법 제정 과정에서부터 차별하고, 법안의 본질을 무시하는, 이상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효율(?) 좋은 제안이다. 그렇게 해서 입법이 된다고 하면 아무도 차별금지법으로 보호받지 못할 테지만.

정의로운 전환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 정의가 무엇인지 모호하기만 하다. 차별금지법 제정이 불가능하다면, 사회에서 소수자와 약자를 정의 내리는 것도 불가능하며, 앞으로 기후변화로 인해 어떤 불평등이 와도 사회적 약자들은 책임과 피해를 입증하고 보상받는 것조차 불가능해진다. 기후위기에서 정의로운 전환을 하고 싶다면 지금 보이지않는 약자와 차별부터 가시화해야 한다.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정의로운 전환이 기후위기를 막는 것뿐만 아니라, 인류의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한 것임을 새겨야 한다. 또다시 코로나 사태, 그 이상의 재난이 왔을 때, 사회적, 경제적 약자들이 그 피해를 다 떠안아서는 안되며, 지금부터 그 불평등의 악순환을 끊어내기 위해 노력해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촘촘히 짜여있는 혐오 및 차별 등 식민주의와 자본주의의 관계를 처음부터 해체하고 기후위기 대응으로 접근해야 한다.

내가 받고 있는, 혹은 내가 가하고 있는 차별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그 차별로부터 벗어나야만 한다. 성소수자들이 어떤 불이익과 불평등을 받는지 모르겠다고? 그럼 우선 그들이 주변에 있는지 둘러봐라. 없다고? 없는 게 아니라 존재 자체를 거부당하고 있는 거다.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 내가 약자가 됐을 때, 아무도 그 입장을 대변하고 싸워주지 않는다.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약자와 소수자들과 연대하고 함께 싸워야만 이 복잡하고 교차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글은 연대해달라 부탁하고 요청하는 글이 아니다. 정의와 인권을 말하고자 하면 반드시 적극적으로 싸워야 한다는 글이다. 정의로운 전환을 위해서 차별금지법은 꼭 제정돼야 하며, 개인의 차별과 사회의 불평등과 싸우다 별이 되어버린 활동가들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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