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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정칼럼

 
작성일 : 14-10-01 17:53
"탈핵은 장기전이다"_다큐 3일, 일본 핵발전 노동자 한국 체류기 (이강준 연구기획위원)
 글쓴이 : 에정센…
조회 : 18,055  
다큐 3일, 일본 핵발전 노동자 한국 체류기
[에정칼럼] "탈핵은 장기전이다"


후쿠시마 사고 당시 현장에 있었던 니이쯔마 히데아키, 핵발전 노동자를 지원하고 있는 나스비, 41년째 핵발전 노동자를 취재해온 사진작가 히구치 켄지는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가 주관한 ‘한일 핵발전 노동 워크숍’을 위해 한국에 왔다. 이들이 한국에서 체류했던 지난 3일 동안의 주요 일정을 중심으로, 핵발전 노동을 둘러싼 여러 가지 질문과 고민을 간추려 보았다.

# 9월 22일(월) 11시 30분 _ 한일 핵발전 노동자들이 만나다.

첫 일정은 한국과 일본의 핵발전 노동자들의 교류회였다. 공공운수노조․연맹 산하 환경에너지안전협의회 소속 한국원자력연료지부와 한국전력기술지부, 그리고 민주노총 소속은 아니지만 한국수력원자력 노조 지도부와 오찬을 겸한 교류회를 진행했다.

@공공운수노조․연맹 환경에너지안전협의회

교류회가 진행되는 동안, 한국 참석자의 핵발전소 운영을 “공공과 민간이 하는 경우, 어느 쪽이 더 안전한가?”라는 다소 기대 섞인(?) 질문에, 나스비 씨가 “둘 다 안전하지 않다”고 단호하게 답변해 순간 애매한 분위기가 조성됐다.

올해 77세인 히구치 씨는 손 글씨로 쓰고 그린 일본 핵발전소의 하청구조도를 펼쳐 보이면서, “원청에서 일당 5만 엔으로 책정된 1인당 인건비가 5~6단계의 인력파견회사로 내려오면 1만 엔 안팎으로 떨어진다. 중간에 다 ‘삥땅’치고, 더구나 하도급업체의 노동자들은 노조로 결성돼 있지 않아, 사고 등 불이익에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쫒겨 난다.”며 중층하청구조의 실태를 고발한다.


히구치 켄지,“단 하루의 제염작업 중, 심근경색으로 사망한 노동자가 기억에 남는다.”

보도 사진 작가. 1960년대부터 공해 산업 재해, 환경오염, 원자력발전소 피폭노동 등의 문제를 탐사취재 해왔다. 1995년에는 영국의 공영 방송채널4의 리포터로 다큐멘터리 ‘숨겨진 피폭 노동, 일본의 원전 노동자’(“Nuclear Ginza)에서 원자력 발전소에서 산업 재해를 취재했다. 현재도 각지에서 강연 활동, 핵발전 노동자사진전 등을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1974년 유엔 세계 환경 사진 콘테스트 프로 부문에 「욧카 이치」로 입상했고 2001년 세계 우라늄 청문회 핵 없는 미래 상 (en : Nuclear-Free Future Award) 교육 부문을 수상하였다. 2011년 “원전 붕괴 ~ 히구치 켄지 사진집 ‘으로 제17회 평화협동저널리스트기금을 수상하였다.

- 저서: 『어둠에 지워지 원전 피폭자』(삼일서점 1981), 『일본 파괴 열도 1970-1990』(삼일서점 1992), 『환경 파괴의 충격 1966-2007』 (신풍사문고 2007) 외 다수

사진집: 『사진 문서 원전 히구치켄지 사진집』 (오리진출판센터 1979), 『원전 1973년~1995년 히구치켄지 사진집』 (삼일서점 1996), 『원전 붕괴, 히구치 켄지 사진집』 (합동출판 2011)외 다수

교류회를 주관한 공공운수노조․연맹 환경에너지안전협의회의 이영원 위원장은 “오늘 일본의 핵발전 노동자, 특히 하청노동자의 차별과 억압의 얘기를 들어 보니, 일본은 철도․원전 등 공공부문의 민영화에 따른 하청노동문제가 심각한 것 같다”며, “이는 한국 정부가 추진 중인 에너지부문 민영화로 인해 나타날 부작용에 대한 경각심을 준다.”고 촌평했다.

# 9월 22일(월) 4시 _ 자신들의 지난 삶과 현재를 말하다.

두 번째 일정은 서강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주관으로 23일 워크숍 참가자를 중심의 사전 간담회가 진행됐다. 이 자리에서 참가자들은 자신들이 살아온 과정과 현재의 고민을 스스럼없이 털어놨다.

후쿠시마 사고 협력업체(하청) 노동자로 근무 중에 대피했던 니이쯔마 히데아키 씨는 “3.11 지진 당시 저는 핵발전소 인근에 있는 사무실에서 정기 검사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3시 40분경 일제히 휴대폰 알람이 울리고 건물이 뒤틀리는 듯한 지진이 발생했다.”라며 사고 당시를 회고했다.

그는 피난 경보에 따라 친척집에 도착해서야, 핵발전소 폭발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그는 현재 핵발전에 대해 찬성도, 부정도 하지 않고 있는 애매한 상태라며, 다만 후쿠시마 사고의 교훈은 “원전은 인간이 만든 물건이라서 100% 안전이라는 건 있을 수 없고, 사고가 발생하면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다.”며, 안전 대책이 부실하다면 “원전은 아예 가동하지 않는 것이 좋지 않나 생각한다.”고 했다.


니이쯔마 히데아키, “핵발전소 인근이 복구되더라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겠다.”

1982년 1월 20일생. 32세. 후쿠시마현 후타바군 나라하마치 출신이다. 3.11 당시는 楢葉町(나라하마치)에서 살았으나 나라하마치는 원전 사고로 인해 거주가 제한된 구역이어서 자택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피난생활을 하고 있다. 현재는 이와키시(いわき市)에서 거주하고 있다. 원전사고 당시에는 동경전력 하청업체에서 근무했고 정기점검에 따른 관리업무(디젤 발전기의 분해·점검의 보조업무/ 밸브 분해에 따른 점검업무/ 점검 관리 전 상태 확인: 사진 촬영)를 담당했다. 2014년 4월부터 이와키 오텐토썬기업조합에서 일하게 되었고, 방사능위험 경계지역을 포함한 투어업무를 맡고 있다.

나스비 씨는 자신의 이름은 채소‘가지’라는 뜻인데 일용 노동자가 지어준 가명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대학교 3학년이던 1986년 5월, 인력시장의 착취구조를 다룬 ‘산야, 당하거든 되돌려 줘라’라는 영화를 보고, 산야에 다니며 지원운동에 참가하게 되었다고 한다. 마치 한국의 70~80년대 현장으로 투신한 학생운동 선배들을 보는 듯 했다.

그는 현장에서 노동상담과 노동쟁의뿐 아니라, 의료․생활․복지담당, 병원 면회, 배식과 노숙자 순회방문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그러던 중 히구치 켄지 씨의 강연을 보고 핵발전소 노동자의 현실과 그 최말단에 일용직 노동자가 있음을 알게 되었고, 현재는 피폭노동을 생각하는 네트워크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

히구치 켄지씨는 “1969년부터 미에현 욧카이치시의 공해문제로 항의 자살한 분을 취재하면서, 공해문제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인근의 석유 콤비나트가 원인이라는 결론을 내렸고, 그 다음은 핵발전소라는 도식이 보였다.”며, 1973년경 처음 핵발전 노동을 취재한 계기를 설명했다.

그는 “핵발전소 피폭이라는 부분이 암흑에 갇혀서 표면화되지 못했는데, 최근 표면화되고 있다”며, “특히 2012년부터 나스비 씨의 역할 등으로 일본 전역에 피폭자 네트워크가 진척되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는 “사진작가로서는 은퇴할 나이지만, 원전관련 사진가가 많지 않고, 일본 내에서 여론이 부족해 아직도 활동해야 할 것 같다.”며 힘주어 말했다. 이미 40년 넘게 핵발전 노동을 취재해 온 현역 다큐 사진가는 여전히 할 일이 많다.

# 9월 23일(화) 2시 _ 한일 핵발전 노동 국제워크숍

주최 측의 욕심(?)으로 일본 참가자들은 매우 바쁜 일정을 소화해야만 했다. 첫날부터 공식 행사 사이사이 연합뉴스, 세계일보 등 인터뷰를 진행했고, 둘째 날도 오전부터 뉴스타파, 경향신문, 한겨레21, JTBC 인터뷰 등 강행군이다.

오후 2시부터 서강대학교 다산관에서 한일 핵발전 노동 국제워크숍이 진행됐다. 첫 번째 발표자인 히데아키 씨는 핵발전소에서 자신이 했던 작업 내용을 자세히 설명했다.

당시 자신은 일당 1만 7천 엔 정도로 꽤 많은 월급을 받았고, 나름의 자긍심도 있었지만, 사고 당시의 망막함을 회고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가족은 임시주택에 거주하고 있고, 나는 임대주택에서 생활하고 있는데, 만약, 후쿠시마가 회복되더라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라고 한다. 후쿠시마 핵발전소에서 일했고, 사고의 피해자로서, 그리고 사고당시 자신과 가족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고,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는 망막함은 그에게는 여전히 진행형일지도 모르겠다.


나스비, “중층하청구조의 핵발전 노동자는 일회용품처럼 다뤄지고 있다”

대학교 3학년 때, 인력시장의 문제를 다룬 “산야, 당하거든 되돌려줘라”라는 영화를 보고, 그 충격으로 최하층 노동자를 지원하는 일을 시작했다. 그는 1986년부터 일용직 노동자들이 많이 사는 토쿄•산야(山谷)에서 일용직 노동자와 노숙노동자들을 지원하는 활동에 참여했다. 3.11핵발전소 사고 이후 “피폭노동 자기 방위 매뉴얼” 제작했다. “피폭노동을 생각하는 네트워크”를 창립해 2012년부터 원전사고 수습작업노동자나 제염노동자의 노동삼당과 노동쟁의에 관한 활동을 하고 있다. 현재는 동경과 후쿠시마에 네트워크가 있고,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 저서: 공저 『원발 사고와 피폭노동』(삼일서방,2012), 논문『잘라 팔린 생명 , 원발피폭노동』(「임팩션」187호, 임팩트출판회,2012). 

두 번째 발표자인 나스비씨는 “1966년 상업원자로 가동 시작 이후, 50만명 가까운 노동자가 이미 핵발전소에서 일해 왔는데, 피폭으로 인한 산재인정을 받은 건 딱 13건 밖에 없다”며, “백혈병과 암으로 죽은 노동자들이 다수 있음에도 산재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고 고발했다.

또한, “후쿠시마 사고 이후 수습과 폐로 작업에서 일하는 노동자한테 받는 상담내용은 피폭문제보다 일반적인 노동문제가 많다”며 “기본적으로는 중층하청구조 말단에서 위장청부, 위법파견업자한테 보내져 임금미지급과 열악한 대우, 그에 기인하는 해고 등의 갈등문제가 많다.”고 한다.


@히구치켄지씨가 41년 동안 취재해서 정리한 일본 핵발전소의 중층하층구조

# 9월 24일(수) 1시 _ 히구치 켄지, 대학생 특강과 토크쇼를 진행하다.

에너지 넘치는 77세 청년 히구치씨는 지난 41년 동안의 취재 경험을 토대로 일본 핵발전의 문제는 ‘인권 무시’라고 단언한다. 그는 23일 국제워크숍, 24일 경희대 특강과 토크쇼에서 “핵발전소 노동의 맨 위에는 9개의 전력회사가 있다. 여기에는 노조가 있지만 그들이 핵발전소에서 하는 노동은 위험하지 않다. 그 밑의 하청, 재하청, 재재하청이 있고, 심지어 인력파견업체가 들어와 있다. 또 그 밑에 일용직 노동자, 농민, 어부, 피차별 부락민, 전 탄광노동자, 도시 빈곤층이 있다. 핵발전소의 위험노동은 그들에게 집중되어 있다. 이들은 미조직 노당자의 무리이고, 사회보장도 없다. 여기는 인권무시의 세계이다.”라며 핵발전 노동의 중층하청구조를 비판했다.

이번에 한국에 처음 방문한 그는 이번 강연이 152번째라고 한다. 아무도 핵발전 노동에 관심을 갖지 않았던 1970년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그의 기록과 취재, 그리고 강연과 고발은 나스비씨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인권무시’의 세계에 있는 핵발전 노동자에 대한 관심을 갖게 했고, 워싱턴포스트지가 크게 인터뷰할 정도로 여론의 관심을 갖게 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 9월 24일(수) 2시 _ 울진 핵발전소를 가다

특강과 토크쇼로 서울에 남은 겐지님을 제외하고, 나머지 일행은 국제워크숍 직후 울진으로 내려갔다. 이들은 직접 한국의 핵발전소를 방문하고, 현지의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만나 간담회를 진행했다.

간담회에 참석한 울진핵발전소 비정규직 노동자는 “우리는 협력업체 밑에서 또 하청을 받는다. 한전KPS에서 하청 받는 데가 주역이 되어 노조를 시작했는데, 우린 3년도 아니고 1년마다 재계약해야 하기 때문에, 노동 불안이 더 심각하고, 그래서 비정규지회 가입이 점점 확대되고 있다.”고 핵발전소 비정규직 노동자의 고용불안을 얘기했다.

@오소영

이번 방한 여정에 자비로 함께한 오텐토 썬 협동조합의 시마무라 모리히토 씨는 “후쿠시마 핵발전소 35km 이와야키시와 한국의 서울, 그리고 여기 울진의 공간방사선량이 거의 같다. 후쿠시마로부터 멀어질수록 후쿠시마에 대한 이미지가 더럽고, 안 좋은 곳으로 인식한다. 그리고 여기 울진을 보니, 20여년 전 후쿠시마를 보는 것 같다. 후쿠시마의 주민들도 핵발전소에서 일하는 것이 긍지인 경우가 많았다”며 소회를 밝혔다.

이어서 “현재 후쿠시마는 방사능에 심각히 오염되었고, 세계에서 악명이 높아졌다. 부디 우리의 교훈을 반면교사로 삼았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3일 동안의 짧은 동행과정에서 개인적으로 여러 질문과 숙제가 남았다. 한국의 핵발전 노동의 현실은 어떤가? 그리고 핵발전 산업의 구조와 실태는? 우리가 탈핵과 정의로운 에너지전환을 위해 실천적으로 고민하는 과정에서 현존하는 핵발전 노동자들의 삶을 어떻게 안을 것인가?

2012년 현재, 원자력산업회의가 집계한 핵발전소 노동자는 28,195명이다. 이들 대부분은 정규직 노동자이고, 핵발전소의 하청구조에 있는 노동자들의 규모는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1979년 고리1호기가 상업 운전한 이래,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핵발전소에서 일했고, 차별과 피폭의 고통을 받았고, 받고 있을까? 그리고 핵발전소의 비정규직 노동자와 일용 노동자는 어떤 차별구조에 있을까?

예컨대, 근로자 지위확인소송을 이유로 해고된 영광 핵발전소 비정규직 노동자는 “한수원 직원과 같은 업무를 하고, 심지어 위험한 업무와 야간노동은 비정규직이 하고 있지만, 매년 재계약을 해야 하는 고용불안에 있고, 10년이 넘은 노동자들의 평균 연봉은 평균 3,000만원이다.”라고 필자에게 증언했다.

또한, 울진 핵발전소 비정규직 노동자는 “정규직의 임금도 부럽지만, 무엇보다 교육”이 부럽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검사 계측제어를 하는데, 권한이 없다.”며 권한과 책임을 주어야 안전관리가 제대로 된다고 항변한다.

탈핵은 장기전이다. 이번 행사를 보기 위해 자비로 한국에 온 히구치 켄지씨의 제자는 앞으로 30년 동안 지진피해지역을 취재할 계획이라고 한다. ‘머리 좋은 사람이 부지런한 사람을 이길 수 없고, 부지런한 사람이 운 좋은 사람을 이길 수 없고, 운 좋은 사람이 명 긴 사람을 이길 수 없다’던가. 어쩌면, 긴 호흡의 고민과 준비, 실천이 필요할 때인지도 모르겠다.

한편, 이번 한-일 핵발전 노동워크샵은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공공운수노조・연맹 환경에너지안전협의회, 녹색당 탈핵특별위원회, 땡땡책 협동조합, 서강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 한일연대미디어 The Ful이 함께 공동주최하였다.



/이강준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연구기획위원

* 에정칼럼은 레디앙에 동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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