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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08-22 18:25
[에너지일반] 배리 카머너의 ‘과학과 정치권력’ 강연
 글쓴이 : 에정센…
조회 : 16,529  

배리 카머너(Barry Commoner)는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에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생태사회주의자였다. 1971년 출판된 그의 베스트 셀러 ≪The Closing Circle≫는 급진적인 환경 분석의 고전으로 남아 있다. ≪The Poverty of Power≫ 출판 전인 1976년 2월 보스턴 코뮤니티 처치에서 강연한 <Science and Political Power> 원고는 한 번도 공개된 적이 없었다. 그러다 생태사회주의의 기원을 연구하는 브랜다이스 대학(Brandeis University)의 학생인 필립 와이트(Philip Wight)가 카머너의 유작에서 찾아냈고, 이 글이 일부 교정돼 <Climate and Capitalism>에 실렸다. <과학과 정치권력>에서 다루는 내용은 한국사회에도 소위 광우병, 구제역, 천안함, 후쿠시마 사건을 비롯한 핵발전소와 밀양 송전탑 등의 사건들을 통해 우리에게도 익숙한 과학사회학과 정치생태학적 주제이다. 한마디로 누구의, 누구에 의한, 누구를 위한 과학인가? 그리고 환경과 노동의 관계에 대한 입장을 생태사회주의 관점에서 제시한다. 다음은 배리 카머너가 강연한 내용의 요지를 정리한 것이다.

<과학과 정치권력>

과학과 정치권력은 어떤 관계에 있을까? 카머너는 우선 닉슨 대통령의 워터게이트 사건(1972~1974년)을 예로 들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닉슨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것은 대중의 물리적 행동이나 사법부의 법적 조처라기보다 닉슨이 독점하고 있던 사실과 정보가 언론에 의해 대중에게 공개된 것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한마디로 진실이 알려진 것이다.

과학 대 비밀
배제적 지식은 정치권력의 원천이다. 과학은 지식을 다루기 때문에 과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런데 과학은 모든 이들이 접근할 수 있는 공개 지식을 다루고, 사실에 대한 공개적 담론으로 이뤄진다. 그렇다면 과학은 왜 이렇게 비밀과 정반대되는 방식을 취할까? 과학은 공개적으로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진실에 도달하는 방식을 취하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이 다른 전문가들보다 진실에 도달한다는 명성을 갖는 이유는 과학자들이 더 진실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어떤 실수이든지 동료 과학자들과 나아가 대중들에게 검토되고 논증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과학은 워터게이트 사건에서 우리가 보는 것처럼 일종의 사회적 행동을 재연한다. 카머너는 과학지식이 정치발전과, 정치 행위와, 특히 환경 이슈와 에너지 이슈와 어떻게 관련을 맺고 있는지 말하고자 한다.

환경승리: 핵실험
핵실험의 방사성 낙진이 좋은 사례다. 소련과 미국의 핵실험금지조약((PTBT, 1963년)으로 대기중 핵실험은 금지되어 있다. 그런데 케네디 행정부가 러시아와 합의한 조약이 어떻게 당시 보수적인 상원에서 비준되었을까? 상원의원들이 유권자들에게서 많은 우편물을 받긴 했지만, 상원의원들을 움직이게 한 것은 유권자들이 핵실험을 반대하다는 입장이 아니라 유권자들이 스트론튬 90의 철자를 정확하게 적었다는 데 있다. 유권자들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상원의원들은 자신의 선거구에서 핵실험에 대한 사실을 알고 그 사실에 기초해 법률을 만들 것을 강요할 유권자들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그 문제를 이해하게 되었을까? 카머너는 1953년 전에 스트론튬 90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고,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랬다. 그러다 사람들은 과학자들로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방사능 낙진에 대해 배웠고 물리적, 화학적, 생물학적 과정에 대해서, 그것도 대학 학과에서 강좌 개설 준비에 있을 때 말이다. 사람들이 배우게 되자 정치적 이슈가 되었고, 그들은 국회의원들에게 그들이 알고 있는 것과 원하는 것들을 말했다. 이 핵실험금지조약의 사례는, 매우 기술적인 것이라도 관련 지식이 사람들에게 제공되면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고, 정치적 변화로 이어진다는, 더 중요하게는 환경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환경패배: 알래스카 파이프라인
알래스카 파이프라인의 사례는 환경패배의 사례다. 알래스카 북부 해변에서 선박 장소까지 수송관이 건설됐다(1973~1977년). 왜 이 사건에서 생태주의자들이 졌을까? 어떤 이슈로 싸움이 벌어졌나? 그 싸움에서 형성된 쟁점은 직접적으로 인간에 대한 것이 아니었고, 카리부(북미산 순록)과 지의류(이끼)를 둘러싼 싸움이었다. 카마너가 보기에 생태주의자들은 잘못된 프레임에서 싸워서 질 수밖에 없었다. 파이프라인이 건설되면 알래스카의 환경과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게 되는데, 환경주의자들은 환경에 어떤 문제가 있는가하는 점에 집중하고 그 현장에서 싸웠다. 그런데 그 싸움의 장소는 석유회사가 원하는 곳이다. 그렇다면 환경주의자들이 놓친 싸움의 장소는 어딘가? 그들은 진실을 추구하는 영역을 생태에서 경제로 바꿔서 파이프라인이 경제적 의미와 영향이 어떠한지를 요구했어야 했다. 훗날 해당 석유회사가 엄청난 이득을 얻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 전에 생태주의자들은 알래스카 파이프라인은 석유회사의 경제적 이윤을 위한 광맥이라는 점을 대중에게 명확하게 밝혔어야 했다. 즉 석유회사의 이윤 추구라는, 문제의 진짜 원인을 밝히는 진실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시야를 넓히고 대중들에게 그 점을 알렸으면, 워터게이트에서 봤던 정치적 반응을 기대할 수도 있었다. 석유파동을 겪고 있던 당시에 세븐 시스터즈의 석유시장 과점에 대한 정치적 논란이 있었다. 예컨대 뉴욕타임즈는 매주 일면에 석유회사들이 높은 이익을 소개했다.

대중에게 사실을
누군가 문제의 근원을 추적해 대중에게 폭로한다 할 때, 그것은 정치적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을 염두에 두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근원에 도달하지 못하면 그것은 그 누군가에게 책임이 있다.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것 또한 그의 책임이다. 최근 미국에서는 환경보다 경제를 우선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고 환경운동이 밀리고 있다고 생각된다. 환경운동의 후퇴는 경제를 우선하는 힘에 맞설 수 없기 때문이다. 일자리와 환경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카머너는 개인적으로 환경을 선호하지만, 그런 선택지 자체가 잘못됐다고 주장한다.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는 것이다. 카머너는 환경, 에너지 사용, 생태계와 자원 전체의 상호작용과, 이것들이 상품 생산, 복지, 일자리와 어떤 관련을 맺고, 우리가 현재 직면한 경제적 어려움과 어떤 관련을 맺는지 이야기한다. 카머너는 청중에게 어떻게 하면 환경과 일자리 모두를 구할 수 있는지, 또는 에너지를 절약하면서 경제 시스템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지 설명하라고 한다. 카머너가 보기에 대부분은 이런 질문에 아직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어려운 문제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런 주제로 정치권력과 상대하는 데 주저하게 된다. 카머너는 핵발전에 대한 어느 토론 장소에서도 이와 유사한 경험을 했다고 소개한다.

다음으로 카머너는 미국의 석유부족에 대한 이해를 바로 잡고자 한다. 미국의 부존 석유가 급속히 고갈되고 있어 미국은 석유의 35~40% 수입하고 있고 1973년에 석유금수 조치가 내려졌다는, 이러한 일반적 설명 전체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석유 매장지 발견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왜 떨어지고 있는지 설명이 필요하다. 데이터를 조사해보면, 1955년 이래 미국내 유정 탐사가 그 전보다 50% 떨어졌다. 그렇다면 사실은 간단하다. 석유회사들이 탐사를 하지 않아서 유정이 발견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1950년대에 해외 개발에 진출한 컨티넨탈 오일 컴퍼니의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카머너의 이 주장에 대해서는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카머너의 주장은 허버트 곡선으로 대표되는 미국의 석유생산정점 논리와 배치되는 것으로 읽힌다. 그러나 석유생산정점론이 석유고갈에 대한 생태-사회적 구조적 접근이라면 카머너의 접근은 석유기업의 경영전략의 변화(미국보다 중동에서의 수익률이 높아짐)를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어 석유생산정점을 부정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필요는 없겠다. 아무튼 카머너가 보기에 미국의 석유 부족의 진실은 이렇다. 석유회사는 석유 생산을 목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오직 최대의 이익에서만 석유를 생산할 목적을 갖는다.

이윤의 법칙
이렇게 석유회사는 석유가 아니라 이익을 생산하는 사업이다. 1970년대 석유파동의 여파로 미국에서도 석유가를 비롯해 물가가 엄청나게 상승했다. 그런데 이것은 사적 기업 시스템이 작용하면서 나타나는, 정상적이고 자연적인 사회 무질서이다. 

나쁜 디자인으로 인한 에너지 낭비
카머너는 이윤의 법칙 다음으로 열역학 법칙을 설명하고 전기와 열 사용에 대한 비효율성을 지적한다. 발전소를 예로 들어, 연료의 열량 35%만이 전기로 전환되고 나머지는 폐열 등으로 버려지기 때문에, 우리가 경제 시스템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하기 전에는, 그 동안은 에너지를 절약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절약해야 할까? 난방을 위해서 전력을 사용할 때, 발전소에서 폐열이 나온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폐열로 난방을 할 수 있다. 뉴욕의 일부 건물에서 이런 증기와 폐열을 사용하고, 모스코바에서는 대부분 그렇게 사용한다. 이렇게 발전소는 전기와 폐열이라는 두 가지 에너지를 산출한다. 필요한 에너지가 열이나 온수인 경우에는 전기를 사용하기보다는 폐열을 사용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다. 그러나 가정은 폐열을 사용할 수 있게 발전소와 연계되어 있지 않다. 열역학적 효율로 볼 때, 미국에서는 물을 데우는 데 엄청나게 비효율적이다. 그 결과 열역학적 효율이 2%에 불과하다.

비효율적 수송으로 인한 에너지 낭비
수송 시스템의 열역학적 효율은 10%이다. 자동차의 엔진 동력의 일부만 운동 에너지로 변환되고 나머지는 공기중으로 열로 발산된다. 전기 기차와 같은 대중교통은 에너지를 열역학적으로 적합하게 사용하는 것으로 훨씬 효율적이다. 자동차와 달리 발전소에서 생산된 전력을 사용하고 폐열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도시에서는 트롤리(혹은 트램)가 적합한 교통수단이 된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자동차 회사와 석유 회사들이 도시 곳곳에서 그런 교통수단들을 없애버렸다. 이렇게 열역학적으로 효율적인 도시 교통시스템이 사라진 이유는 바로 이윤만을 추구하는 기업의 횡포 때문이다. 사적 기업 경제 시스템이 작동한 결과 에너지 낭비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합성화학으로 인한 에너지 낭비
다음으로 카머너는 핸드백을 예로 들어 합성화학에서의 에너지 비효율을 문제 삼는다. 즉, 핸드백을 만드는 데 에너지 사용의 효율성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플라스틱으로 핸드백을 만드는 것은 가죽으로 만드는 것보다 5~10배의 에너지가 더 많이 소비된다. 플라스틱은 석유로 만들고 여러 화학 반응을 거친다. 따라서 가죽보다 단위 제품당 더 많은 에너지가 사용된다. 합성섬유 제품 역시 마찬가지다. 석유화학 플랜트는 거대한 장치산업으로 막대한 자본이 투입된다. 따라서 플라스틱 가방을 생산하는 것은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이고, 자본을 낭비하는 것이다. 반면 노동력은 덜 사용한다. 석유화학산업은 GNP의 20%를 생산하지만 고용률은 2%에 불과하다. 미국에서 이런 산업이 성장하면서 에너지는 노동을 대체하는 기계를 움직이는 데 사용되고 있다. 그 결과 우리는 에너지 부족, 자본의 부족 그리고 노동의 과잉(일자리의 부족)의 시대를 향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에너지 사용을 줄이고, 예컨대 석유화학산업을 줄이면, 일자리를 만들 수 있게 된다.

사회주의로 해결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미국에서 제품을 어떻게 생산하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인간의 필요가 아니라 이윤을 극대화하는 데 기초한다. 그리고 좋은 환경과 일자리를 동시에 갖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비관적 생각을 하게 된 데는 우리가 자원을 사용하는 방식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열역학이나 화학제품이나 자연자원을 어떻게 사용할지에 결정하는 데 사적 이윤이라는 동기를 우선한다. 이제 우리는 사람들에게 무엇이 좋은 일인지 질문해야 한다. 수익성이라는 한 가지 기준에 따라 모든 결정이 내려지는 미국에서, 수천가지의 결정이 이뤄진다면 기적이 일어날 것이다. 환경에 해를 주지 않고 많은 일자리가 생기도록 자원들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다양한 결정이 가능하다면 말이다. 답은 우리가 현재 작동하는 경제 시스템을 재조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칼 맑스가 정확하게 분석했던 내용이다. 이제 우리는 경제 시스템의 자본주의적 조직을 인간의 필요, 사회적 필요, 다시 말해 사회주의의 것으로 대체하는 것을 생각할 때다.<by 필>

* 참고 자료
http://climateandcapitalism.com/2013/07/30/exclusive-an-unpublished-talk-by-barry-commoner/?utm_source=feedburner&utm_medium=feed&utm_campaign=Feed%3A+climateandcapitalism%2FpEtD+%28Climate+and+Capitalism%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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