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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1-05-26 13:47
[언론기사] [에큐메니안] 제3세계와 불평등, 기후정의
 글쓴이 : 에정센…
조회 : 20,182  

제3세계와 불평등, 기후정의 
개발원조기획연재-라오스 태양광발전기 지원활동 이야기(4) 


25명의 어린 소년들이 핵전쟁의 위험을 피해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려다 비행기 사고로 무인도에 표류됐다. 초기 합리적인 생활규칙을 만들어 생활하던 그들은 일부 소년들이 단조로운 생활조건을 견디지 못하고 권력욕을 보이면서 와해되기 시작한다. 끝내 공격성을 보이던 소년들은 갱단을 조직하고 무리를 이탈해버렸다. 이후 두 세력은 치열한 생존다툼을 벌이며 급기야 살인까지 저지른다. 그들만의 사회관습은 붕괴되고 이성적인 행동을 지지하던 소년들은 갱단에 의해 쫓기는 신세가 된다.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긴 소년들은 영국 순양함에 의해 가까스로 구조된다. 아이들을 구출하러 온 장교가 심신이 지친 아이들에게 한 마디를 던진다. “재미있는 놀이를 했군.”

 1954년에 발표되어 작가에게 노벨문학상의 영예를 안겨 준 소설 <파리대왕>의 줄거리다. <파리대왕>은 극한 상황에서의 인간의 야만성과 폭력성을 가장 적나라하게 그린 수작으로 꼽히고 있다. 제목으로 쓰이고 있는 ‘파리대왕’ 역시 성경에서 우상의 대표격으로 쓰이는 바알세불의 상징이어서 작가가 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더 선명해진다. 하지만, 여러 차례 영화화되기도 한 데다, 무인도와 같은 폐쇄된 상황에서 인간의 본성이 폭력적으로 나타난다는 유사한 서사구조가 흔해지면서 지금은 어디선가 많이 본 법한 그저 그런 이야기처럼 인식이 되고 있다. 만약 당신도 <파리대왕>을 그렇게 읽어낸다면 그건 작가가 의도한 또 다른 의도를  중요한 것을 놓치는 셈이다.

<파리대왕>이 다른 그저 그런 작품들과 가장 크게 다른 점은 바로 작품 말미에 나온 영국 장교의 말에 있다. 짧지 않은 시간 아이들이 두 패로 나뉘며 서로에게 가한 위해와 생존 투쟁이 어른의 눈에는 단지 ‘놀이’에 불과했다는 것 말이다. 심지어는 25명의 소년들이 무인도에 갇힌 이유가 자신들의 핵전쟁 때문이었는데도 말이다. 작가는 그들이 보다 탐욕적이 되고, 서로에게 창끝을 겨눠야 했던 이유가 타인에 의한 것이었고, 그것을 남의 일로 단정하는  부도덕한 태도를 강력하게 비난하고 싶었던 것이다.

과학이 발달하고, 이성이 사회를 지배하며, 민주주의가 발달한 현대 사회에서는 이제 그런 식의 야만성은 사라졌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사회는 무인도에 갇힌 소년들 마냥 자신을 위해 허우적댄다. 그리고 부자는 영국장교의 눈으로 전세계 빈자들을 바라본다. 적어도 기후변화를 둘러싼 상황은 우리가 아직 <파리대왕>의 무인도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미국 환경정보청(EIA)따르면 2009년 현재 에너지소비에 의한 전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은 303억1천3백만 CO2톤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는 2,000년 대비 27.9% 증가한 양으로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기 위해 체결한 UN기후변화협약에도 불구하고 온실가스는 더욱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많은 온실가스는 누가 배출하고 있을까?



CO2(이산화탄소) 전체 배출량 1, 2위인 중국과 미국이 배출한 양이 전체의 43.2%를 차지하고 있다. 유럽을 합치면 전체의 57.3%에 해당하고, 우리나라를 포함한 배출량 상위 10개 국가의 CO2배출량은 전세계 배출량의 66.7%에 이른다. 나머지 220개 국가는 다 합쳐도 33.3%밖에 되지 않는다. 흔히 불평등한 사회구조를 가리킬 때 ‘2:8사회’라는 개념을 많이 차용하는데, 기후변화에 있어서만큼은 그 개념은 절대 통용되지 않는다. 2명이 8개를 가지고 8명이 2개를 가진 사회가 아니라 1명이 50개를 가지고, 50명이 1개를 나누는 ‘1:50사회’기 때문이다.

1인당 CO2 배출량을 보면 불평등은 더욱 도드라진다. 산유국과 소국을 제외하면 1인당 CO2 배출량이 가장 높은 국가는 호주로 연간 1인당 19.6톤을 배출하고 있다. 그 외에 미국 17.6톤, 캐나다 16.1톤, 러시아 11.1톤 순으로 높은 1인당 배출량을 보이고 있다. 반면 아프리카 차드의 경우 1인당 CO2 배출량이 0.028톤이고, 아프가니스탄도 0.029톤에 불과하다. 호주인 1명이 차드인 700명이나 아프가니스탄인 675명이 쓰는 에너지를 혼자 쓰고 있는 셈이다. 이런 수준이면 호주의 작은 마을 하나가 차드와 아프가니스탄의 작은 소도시와 거의 같은 급의 에너지를 쓰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역시 마찬가지어서 연간 1인당 CO2배출량은 10.82톤으로 전체 36위에 해당하지만 배출량이 많은 10개 국가로 한정하면 4~5위에 이른다. 차드인 386명, 아프가니스탄인 373명의 온실가스 배출량에 해당한다. 제3세계가 선진국이 쓰고 남은 에너지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 아웅다웅하는 양상이다. 그들은 에너지 부족에 허덕이지만 우리나라를 포함한 선진국은 넘치도록 많은 에너지를 쓰고 버린다.

 반면 기후변화 피해는 정반대로 나타나고 있다. 국제개발센터(Center for Global Development)의 기후변화 취약성 지도에 따르면 기후변화에 가장 취약한 지역은 동남아시아, 남아시아, 아프리카, 남미에 집중되어 있다. 대부분이 온실가스를 거의 배출하지 않는 제3세계 국가들이다. 가뭄, 홍수, 폭풍 등 기후변화에 따른 이상기후 현상에 가장 영향을 많이 받는 나라는 1위가 중국, 2위가 인도, 3위가 방글라데시, 4위가 필리핀, 5위가 베트남이 차지했으면 그 뒤로 홍콩, 소말리아, 마카오, 수단, 에티오피아가 10위권을 형성하고 있다. 1위부터 50위까지 국가 중에서 선진국은 미국(25위), 일본(43위), 호주(45위), 캐나다(48위)로 4개 국가에 불과하지만, 해당 국가들은 경제적․기술적 역량이 있기 때문에 피해를 최소화시킬 수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즉 지구온난화에 책임이 거의 없는 국가들이 지구온난화에 따른 피해에는 가장 취약한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기후변화 피해는 단순히 환경과 경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일부 국가들의 경우에는 생존권과 직결된다. 해수면 상승으로 인해 미국이 자국의 산업보호를 이유로 교토의정서 비준 거부를 선언한 2001년, 남태평양의 조그만 섬나라인 투발루는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국토포기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투발루는 해수면 상승으로 인해 21세기 중반이면 국가 전체가 수장될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이다.

투발루 대통령은 국토포기선언과 함께 인근 선진국인 호주와 뉴질랜드에 투발루 국민을 난민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줄 것을 요청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또한 현재 국제 기후변화협상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논의되고 있는 것이 바로 전지구 온실가스 감축목표인데, 작년 유엔기후변화총회에서 ‘산업화 이전에 비해 전지구 평균기온을 2℃ 상승으로 제어’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상당수의 과학자들이 2℃가 높아지면 투발루와 몰디브 같은 군소도서국가들은 해수면 상승으로 인해 바다에 수장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사실상 힘을 가진 선진국들이 자신들의 편의와 풍요를 유지하기 위해 전지구적 약자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것이 기후변화가 우리에게 들쳐 보여주는 현대 인도주의의 본질이다. 심지어는 아프리카와 남미, 중동 지역은 기후변화로 인한 극심한 피해로 인해 수자원 등을 확보하기 위해 전쟁까지 벌이고 있다. 20세기 최악의 범죄로 꼽히고 있는 수단의 다르푸르 사태 역시 사건의 촉발은 해당 지역의 가뭄이었다. 이는 불평등의 문제를 넘어선 사회적 부정의(不正義)의 문제다.

 기후 부정의의 문제는 이처럼 구조적인 양상으로 나타난다. 2010년에 방문했던 라오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현재 라오스인들의 1인당 평균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0.19톤에 불과하다. 호주인의 1/98에 불과하다. 수도인 위양짠뿐만 아니라 관광지인 루앙파방까지 저녁이면 불을 켠 곳보다 어둑어둑한 곳이 더 많고, 서민들이 사는 주거지에서는 불빛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에너지 빈곤이 일상화된 것이다.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에서 태양광 발전기를 지원한 산간 학교와 부설 기숙사 역시 야간에는 불을 밝힐 수가 없어 학생들의 학습권이 심각하게 침해를 받고,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혹자는 반드시 전세계 모든 국가가 현대 문명의 관습대로 살아갈 필요는 없고, 전통적 삶의 방식 역시 소중하다고 말할 지도 모르겠다. 지당한 말이다. 하지만, 라오스는 그렇게 에너지가 부족한 국가가 아니다. 라오스의 젖줄인 메콩강에서는 라오스에서 사용할 수 있을만한 수력발전이 가동 중이지만 대부분의 에너지는 태국 등 인근 국가로 판매되고 있기 때문이다.

자원은 수탈당하고, 이에 따른 피해는 사회적 약자에게 편만하게 전가되고 있는 것이다. 경제적 강자들의 풍요와 경제적 수요를 유지하기 위해 라오스 민중들이 에너지 빈곤에 허덕이며 각종 천부인권들을 침해받고 있다면 그건 문명의 타당성과는 다른 이야기다. 그것은 기후 부정의기 때문이다.

 이런 기후 부정의 문제는 사회 구조적으로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에너지 판매로 인한 이익은 경제발전이라는 미명하에 사회 일부 분야에 집중되기 마련이고, 이에 따라 분배적 정의는 무너진다. 하지만 라오스 민중들은 빡빡한 환경으로 인해 하루하루 생존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 과정에 참여하기 힘들다.

오히려 부실한 사회적 보장으로 인해 기후변화 피해가 가속화되면서 나타나는 피해가 고스란히 개인의 피해로 환원되는 상황에 놓여 있다. 여전히 도시보다는 시골이 그 중에서도 사회적 최약자 계층들은 더 큰 피해를 입고, 더 큰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이런 불합리한 상황은 그들이 선택한 것이 아니고 타의에 의해 구축된 것이고, 여전히 구조적인 견고함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러한 환경을 가진 제3세계 사람들에게 측은지심을 갖는다. 그런 후에는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그들을 원조하려 노력한다. 하지만, 기후변화는 단순히 인간 윤리의 문제가 아니고, 강자가 약자에게 강요한 구조의 문제다. 기후변화를 환경의 문제나 윤리의 문제로 접근하는 것은 이러한 구조적 문제는 도외시한 채 단순히 개개인별 문제로 축소화할 수 있다. 그들을 동정하고 원조를 통해 문제를 풀겠다는 것은 스스로 허락한 면죄부에 불과하다.

 기후정의란 기후변화로 야기되는 경제․정치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사회적 정의를 전제로 분배적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정책수립과정에서의 공평한 참여를 보장하고, 정책의 결과가 미치는 책임과 영향이 공평하게 배분되도록 하기 위한 대응방식으로 정의내릴 수 있다. 기후정의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우선 제3세계 국가들이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 능력을 높이고 에너지 불평등 문제를 해소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원조의 문제가 아닌 책임과 보상의 문제이다. 어쨌거나 그들의 빈곤, 그들의 피해는 우리와 같은 에너지 과소비형 국가들이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파리대왕> 얘기를 해보자. 무인도에서의 소년들의 투쟁은 기후변화로 인해 새로운 생존 방식을 요구받고 있는 우리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그 와중에 강자들의 폭력성과 야만성이 나타나고 약자들은 또 다른 피해를 강요받는다. 우리는 그런 강자의 폭력과 그 안에 내재해 있는 악마성을 ‘파리대왕’이라 불러왔다. 하지만 파리대왕은 폭력적으로 돌변한 한 무리의 아이들이 아니다. 진정한 파리대왕은 소년들을 극한의 상황으로 몰아넣은 어른들이며, 그걸 “재미있는 놀이”라고 일컬은 장교와 같은 선진국들이다. 그것이 기후변화에도 ‘정의’가 필요한 이유다.(계속)

이진우(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상임연구원)


* 기사원문 : http://www.ecumenian.com/news/articleView.html?idxno=8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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