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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9-10-19 09:20
[언론기사] [레디앙] 오일홀릭(2)-석유자본과 영-미의 세계 지배 전략
 글쓴이 : 에정센…
조회 : 19,042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비주류 경제학자인 윌리엄 엥달은 양차 세계대전과 최근의 이라크 전쟁은 물론이고, 코소보 사태, 아프리카 내전, 영국의 아르헨티나 공격 등 20세기에 빚어진 숱한 전쟁들이 모두 석유에서 비롯됐다고 단언한다. 특히 ‘세븐 시스터즈’로 알려진 메이저 석유기업들의 이권과 영미의 세계 지배전략이 수많은 전쟁의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에너지를 지배하라, 그러면 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1974년 OPEC에 대응하기 위해 만든 IEA(세계 에너지 기구)를 주도한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부장관은 일찍이 “식량을 지배하는 자는 한 나라를 지배하고, 석유를 지배하는 자는 한 대륙을 지배하고, 통화를 지배하는 자는 세계를 지배한다”고 설파했다.

   
  
석유자본과 영미의 세계지배 전략을 통렬히 비판한 윌리엄 엥달과 저명한 저널리스트인 앤써니 심슨의 주장을 중심으로 20세기의 분쟁과 전쟁을 관통하는 키워드인 ‘석유’를 다섯 개의 에피소드로 재구성해 보았다.

# 에피소드 Ⅰ. 석유가 세계대전 승리의 피였다

석유가 처음 에너지원으로 관심을 끌기 시작한 건 1882년 당시 함장이었던 영국의 제독 피셔경이 대중강연에서 영국 해군이 차세대 연료로 석탄 대신 석유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부터였다. 당시 군함들은 대부분 석탄을 원료로 사용하던 증기선이었다. 석유를 때는 디젤엔진 전함은 연기를 내지 않아 적에게 들킬 염려가 없는 데 반해 석탄을 때는 배는 내뿜는 연기가 10㎞ 밖에서도 선명했다.

석유를 사용하는 군함은 엔진 무게가 석탄 군함의 3분의 1에 불과했고, 전함 한 척에 기름을 공급하려면 12명의 인원이 12시간 작업하면 끝이었지만, 석탄 배는 500명의 인원이 5일 동안 작업해야만 했다. 석유 동력 선박의 행동반경은 비슷한 석탄 동력 선박보다 4배나 컸다.

마침내 1905년 영국정부는 새로운 연료의 전략적 중요성을 깨닫고, 영국 해군이 석유 공급을 안정화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는 위원회를 설립했다. 특히 이 과정에서 세계대전 전 처칠의 강력한 도입 촉구와 의지로 진행되었다. 영국 정부는 석유가 다량으로 매장되어 있는 중동지역에 하나 둘씩 식민지를 확보하기 시작했다.

15세기 이후 300여년을 이어온 ‘향료’를 확보하기 위한 식민지 쟁탈전이 ‘석유’를 확보하기 위한 자원전쟁으로 전환되었다. 20세기 초 영국이 1차 세계대전을 연합국의 승리로 이끌었던 핵심 요인은 ‘석유’에 있었다.

종전협정 직후 연합군의 전승 만찬장에서 프랑스 상원의원이자 전시 석유 총위원회장인 앙리 베랑제는 ‘석유가 승리의 피였다’고 말했다. “독일은 철과 석탄에 대한 자국의 우위를 과신하여 석유에 대한 우리의 우위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

# 에피소드 Ⅱ. 비밀주의와 카르텔로 무장한 석유자본 ― 석유 칠공주

1차 대전 이후 석유를 놓고 경쟁하던 미국과 영국은 동반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미국의 엑손, 모빌, 셰브런, 텍사코, 걸프와 영국계 BP, 로열더치셸은 이른바 ‘세븐 시스터스’로 불리는 7대 석유 메이저 기업이다. 이들은 1928년 스코틀랜드의 아크나카리에서 제3세계 석유자원을 나누어 갖는 이른바 ‘현상유지 협정(As Is 협정)’을 맺는다.

이후 7개 석유 메이저는 전 세계 석유의 채굴과 정유, 판매에 대한 독점적 권리를 행사했다. 곧 이어 석유 값을 담합하고, 이런 지배력을 깨뜨리려는 위협에는 가차 없이 응징했다. 미국과 영국의 석유 재벌이 세계 석유 시장을 마음대로 주무른 것인데, 배후에 두 나라 정부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최근 이 일곱 공주는 인수와 합병을 통해 기득권 유지를 위해 안간힘을 쏟고 있다. 1999년 엑손과 모빌이 엑손모빌로 합병했고, 걸프석유회사는 셰브론과 BP로 나뉘어 흡수되었으며, 텍사코는 셰브론과 합쳐졌다. 세븐 시스터스는 현재 엑슨모빌, BP, 로열더치셸, 셰브론 넷만 남았다.

그러나 석유 메이저의 영향력은 여전하다. 이들은 포춘이 2009년 발표한 글로벌 500대 기업의 상위 5위 안에 포진하고 있다. 이들 4대 메이저 석유기업의 매출 합계가 1조 5,314억 달러(1,838조), 이윤은 1,166억 달러(140조)에 달했다. 이는 글로벌 500대 기업 전체 매출의 6.1%, 전체 이윤의 14.2%에 해당한다.

특히 석유 메이저 기업들의 절대적 이윤이 타 기업에 비해 월등히 높은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참고로 글로벌 500대 기업 중 석유기업은 49개로 10%에 육박한다.

   
  ▲ 출처=FORTUNE (http://money.cnn.com/magazines/fortune/global500/2009/full_list/)

# 에피소드 Ⅲ. 석유 자주화 앞장서다 의문의 죽음을 당한 伊 마테이

1962년에 일어난 `마테이 사건`은 세븐 시스터즈와 영미의 세계 석유시장 직접 통제의 실체를 여실히 보여준다. 1945년 국영 석유회사의 책임자로 임명된 엔리코 마테이는 적극적으로 탐사에 나서 석유 매장지와 가스전을 잇따라 찾아냈다.

천연가스를 산업도시인 밀라노와 토리노(의 산업도시)로 운반하고자 4,000㎞에 이르는 가스관을 건설하는 한편, 대량생산 체제를 갖추어 낮은 가격에 석유를 공급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1957년 마테이는 세븐 시스터스가 아직 ‘배분’하지 않은 이란 지역의 2만 3000㎢를 시추하고 개발할 수 있는 25년 동안의 독점권을 갖는 대신 수익의 75%를 넘기는 파격적인 내용의 협정을 체결한다.

당시 미-영 메이저 회사들은 50대 50으로 배분한 뒤 운송 부문의 이익을 조작해 막대한 수익을 남기는 것이 상례였다. 또한 마테이는 1958년 소련과 원유를 구매하는 협정을 맺는데, 대금은 현금이 아니라 대구경 송유관을 인도하는 형식의 현물로 지불하기로 했다. 소련은 볼가-우랄산맥에서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헝가리로 이어지는 거대한 송유관망을 건설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이는 막대한 물량의 소련 석유가 동유럽을 거쳐 서유럽으로 공급되는 것을 의미하고, 그 원유는 동유럽에서 소련에 필요한 공산품과 식량으로 교환될 것이다. 석유 메이저들과 영미 정부에게 마테이는 1928년 이래 유지되어 온 세계 석유 질서를 완전히 뒤엎을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1962년 9월 마테이가 건설한 제철소가 소련의 송유관 공사에 투입할 파이프를 생산해 내기 시작했다. 불과 한 달이 지난 10월27일, 마테이의 전용 비행기는 시칠리아를 이륙하여 밀라노로 가던 도중 공중에서 폭발하고 만다. ‘일곱 공주’라는 별명을 처음 만들어 붙이고, 이들 골리앗 카르텔과 맞서 싸우던 이탈리아의 민족주의자 엔리코 마테이의 사망 당시 나이는 56세였다.

비슷한 시기 로마 주재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책임자 토머스 카라메신스가 홀연히 종적을 감추었고, 당시 CIA 국장이었던 존 매콘이 석유회사 셰브런의 주식 100만달러 이상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미국 정부는 `국가안보에 관련된 사안`이라는 이유로 ‘마테이 암살’과 관련한 카라메신스의 보고서를 아직 공개하지 않고 있다.

# 에피소드 Ⅳ. 키신저와 4차 중동전쟁, 그리고 오일쇼크

1973년 5월13일, 스웨덴의 휴양지 '살트셰바덴'에 세계 최고의 금융계, 정치계, 석유 메이저 거물 인사 84명이 비밀리에 모였다. 미국 측 참가자 월터 레비는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수입이 곧 400% 증가할 것이라는 '시나리오'를 발표했다. 시나리오 작성은 닉슨대통령 안보특별보좌관 헨리 키신저가 주도했다.

재정적자와 달러화의 가치 하락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던 미국은 기름 값 상승을 원했는데, 유가가 오르면 결제 화폐인 달러의 수요가 그만큼 증가하기 때문이다. 석유 거래는 달러로 하고 있으며, 항상 달러 체제는 유가변동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참고로 1972년 기준으로 1992년까지 달러 발행이 스무 배이다.

둘째, 석유 메이저들이 북해유전 개발을 위한 탐사비용이 과도하게 지출했는데, 당시의 유가로는 북해유전의 경제성을 맞출 수 없었다. 투자를 회수하려면 유가가 최소한 세 배는 올라줘야 했다. 셋째, 세븐시스터즈는 모건스텐리나 월스트리트 금융회사들과 긴밀히 연결돼 있는데, 이들은 유통부문을 장악하고 있다. 석유 메이저들은 석유 유조선을 이동시키는 유통부문을 조작해 높은 마진을 남겼다. 미국, 석유 메이저, 금융의 이해관계는 일치했다.

결국 비밀회동 5개월 뒤 제4차 중동전쟁(욤키푸르전쟁)이 일어났고, 세계는 미증유의 ‘오일쇼크’로 대혼란에 빠진다. 시나리오대로 아랍 산유국들의 석유금수와 감산조처로 석유 값은 4배 이상 뛰었다. 키신저는 그때 넘쳐나는 오일달러를 뉴욕과 런던의 앵글로색슨 은행에 예치하도록 하는 비밀협정을 맺었다.

세계는 대혼란에 빠지고 특히 제3세계 비산유국들 경제는 처참하게 무너졌으나, ‘세븐 시스터즈’를 비롯한 뉴욕과 런던의 석유·금융 카르텔 세력은 전례 없는 호황을 누렸다.

오일달러는 뉴욕과 런던으로 흘러가 체이스맨해튼, 매뉴팩처러스하노버, 뱅크오브아메리카, 바클레이스, 로이즈,미들랜드은행 등이 석유 위기라는 횡재로 생긴 이익을 향유했다. 미국의 재정적자를 메워졌고, 달러체제는 살아남았다. 또한 수지타산이 맞지 않던 영국 북해유전이 고유가 속에 살아났다.

그러나 제3세계는 기름 값 폭등과 원자재 값 폭락, 뒤이은 미국의 고금리정책으로 완전히 빚더미 위에 올라앉았다. 언제나처럼 국제통화기금(IMF)이 해결사로 등장했으나 예의 긴축정책과 통화평가절하, 규제완화와 민영화 등은 사태를 오히려 악화시켰다. 이를 통해 엄청난 부가 빈국에서 부국으로 흘러갔다. 세계 지배를 보장하는 세 가지 수단으로서 ‘전쟁과 금융, 그리고 석유’의 삼각동맹은 맹위를 떨쳤다.

# 에피소드 Ⅴ. 송유관로 확보를 위한 아프가니스탄 침공

분쟁이 일어나는 지역은 언제나 막대한 원유와 가스 매장지가 있거나 중요한 송유관로가 통과하는 곳이다. 미국은 여러 경로를 통해 사전에 혼란을 조성한 후 분쟁이 발발하면 평화와 지역안정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개입한다. 전쟁이 끝나도 미군을 지속적으로 주둔시키며 직접적인 군사지배를 통해 중요한 자원을 통제했다. '테러와의 전쟁'은 이런 추론을 정확히 입증한다.

미국은 9·11 테러가 일어나기 몇 해 전만해도 탈레반 정권과 끈끈한 관계를 맺었다. 워싱턴은 처음에는 탈레반 정권을 송유관로 사업의 파트너로 생각했다. 부시 대통령과 체니 부통령을 재정적으로 지원했던 기업 역시 아프가니스탄을 경유하는 수십억 달러의 송유관로 협상을 은밀히 벌이고 있었다. 그 기업은 미국 역사상 최대의 기업 파산이자 사기극을 장식했던 엔론이다.

탈레반과의 협상결렬로 고민하던 미국은 9·11 사건으로 카불에 융단폭격을 해댈 구실이 생겼다. 예상대로 탈레반 정권은 2002년 '가볍게' 붕괴됐다. 부시는 기다렸다는 듯 석유회사 '유노칼'의 고문을 지낸 하미드 카르자이를 전후 폐허가 된 아프가니스탄의 대통령 자리에 앉혔다. 이후 카이자르는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인도까지 이어지는 20억 달러 규모 가스 송유관 사업을 체결했다.

역사는 잉크 대신 석유로 쓰여진다

20세기 대다수의 분쟁과 전쟁은 ‘석유’라는 키워드로 재구성할 수 있다. 세븐 시스터즈와 영미정부, 국제 금융의 삼각동맹의 카르텔 구조를 함께 볼 때 역사적 진실에 좀 더 다가갈 수 있다.

제 3세계에서 일어나는 각종 쿠테타와 암살(혹은 의문의 죽음), 명분 없는 대테러 전쟁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석유와 송유관로 확보를 둘러싼 암투는 아닐까. 결국 미·영 등 소수 부국들의 성장은 ‘값싸고 풍부한 석유(원자재)’ 덕이었으며, 이는 힘으로 세계 대다수 지역 개도국들의 성장과 복지를 강탈한 것과 다름없다.

2009년 08월 04일 (화) 09:16:37 이강준 / 에너지정치센터 기획실장 redian@redia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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